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국의 성씨 (문단 편집) === 고대: 토착 성씨의 등장 === 한국의 성씨는 [[삼국시대]]에 [[한자]] 등 중국 문물 수입과 함께 도입되었으며 한민족식 복성도 사용하였다.[[#출처 필요]] [* 중실, 대실, 명림, 부여, 목리, 사택, 고이([[고이만년]]), 재증([[재증걸루]]), 흑치([[흑치상지]]) 등.] 단, 이런 한민족식 복성이 중국 사서나 삼국사기에서는 중국식 단성으로 표현된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백제의 [[부여씨]]가 중국에는 [[여씨]]로 알려진 식이다. 중국이 단성을 주로 사용하기 때문에 고대 한민족인들이 거기에 맞춰준 것으로 보이지만 일본서기의 경우 고대 한민족식 성씨 그대로 표현했기 때문에 성씨가 복성으로 표현되었고 [[신라]]의 [[이사부]] 등도 이질부례지간기 등으로 표현되었다. 이것을 보아 중국 사서와 그것을 인용한 삼국사기에서는 한국의 성씨를 표현할 때 한민족식 복성보다는 중국식 단성 성씨로 표현을 바꾸어 기록한 것을 알 수 있으며 일본의 [[왜5왕]]들 또한 중국 기록에서는 ‘왜’라는 단성으로 표현된다. [[신라]](+[[가야]])는 금석문 등을 통해 볼 때 삼국시대 초기에는 부족명이나 지명에서 따온 토착식 성씨를 사용하였으나 고구려, 백제와 마찬가지로 삼국시대 후기로 갈수록 중국식 단성을 사용하게 되며 토착식 성씨는 거의 없어지게 된다. [[백제]] 또한 중국 측 기록에서는 단성으로 나타나지만 일본서기 등에서는 발음 그대로 한자로 표현하여 복성으로 나타나는 경향이 많다. 오늘날에는 중국 성씨와 겹치는 1음절 한자를 쓴 성이 절대다수이고 제갈, 남궁 등 [[복성]]도 중국 귀화성이 주류이나, 고대의 성의 양상은 훨씬 다양했다. 예를 들어 [[삼국시대]] [[백제]] 인명에서는 독특한 복성인 부여(扶餘)[* 왕성(王姓)으로 부여 대신 여(餘)만 이용해 1음절로 쓰기도 했다. 그 후손이라는 현 부여 서씨의 경우 여(餘)와 비슷한 한자인 서(徐)로 성을 바꾸었다고 한다.], 흑치(黑齒)[* 흑치의 한자 뜻을 그대로 해석해서 이를 검게 물들이는 동남아 및 일본의 풍습과 관련지어 남방민족 계통 성씨라는 주장이 있기도 하지만, 끼워맞추기일 뿐 사실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사택(沙宅) 등의 사용이 보이며, 을지(乙支), 을(乙), 명림(明臨) 등 고구려 계통의 성도 보인다. 다만, 을지의 경우는 을+존칭의 접미사라는 설도 꽤 유력하며[* ~지는 [[삼국시대]]에 [[고구려]]부터 [[가야]]까지 한반도 전역에 걸쳐 보편적인 존칭접미사로 쓰였다.] 고구려 인명의 경우 초기에는 대실씨, 명림씨 등 복성이 확인되나 후기로 갈수록 대부분 1음절 성씨를 사용하였다.[* 훈독을 했을 수는 있으나 한자 자체는 1글자인 경우가 많았다. 아무래도 중국과 거리가 가장 가까웠으며 중국의 여러 군현을 정벌하고 투닥거리는 과정에서 중국계 인구를 가장 많이 흡수했기 때문에 중국의 문화 또한 빠르게 흡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복성을 가장 많이 사용한 건 [[백제]]였다.[* 이 때문에 [[백제]]의 복성이 [[일본]]의 복성에 영향을 주었다라는 추정도 있다. [[일본서기]] 등에 기록된 고대 일본의 인명 중에 모노노베(物部), 오호토모(大伴), [[카츠라기]](葛城) 등 두 글자짜리 씨족들이 자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 일본에서 복성이 보편적으로 사용되게 된 건 중세시대를 지나면서 기존의 성(姓) 대신 영지명을 씨(氏)로 사용하게 되면서부터였다. 오히려 [[헤이안 시대]] 일본의 최상위 귀족들의 성씨인 4대 본성 '겐페이토키츠(源平藤橘)' 중 [[후지와라]](藤原)氏만 복성이고 [[미나모토]](源)氏, [[타이라]](平)氏, [[타치바나]](橘)氏는 모두 단성이었다. 성씨 제도가 완전히 정착하기 전의 일본 귀족의 이름은 관직명, 영지명, 존칭 등을 다 붙여서 굉장히 복잡한 모습을 보이며, 이는 [[백제]]보단 오히려 초기 [[신라]]나 [[가야]]의 이름 형태와 유사했다.] 한편 [[고구려]]의 대막리지 [[연개소문]]은 [[일본서기]]에서 그의 이름이 "이리카스미"로 적혀 있어 연(淵)으로 적어놓고 훈독을 했다는 추정도 가능하다. 이러한 고구려, [[백제]]계 성씨들은 [[신라]]가 병합한 이후로 거의 사라진 후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다. 이후 [[남북국시대]]에 [[당나라]]의 문화가 [[동아시아]]의 표준 규범으로 자리잡으면서 [[발해]] 또한 중국식 문화를 수용하게 되어 중국식 1자 성씨를 지배층에서 주류로 사용하게 된다. 그리고 성씨의 대부분은 [[고려]]시대부터 본격적으로 기록에 등장하기 시작하여 세계를 세기 때문에[* 대부분의 족보는 ‘중시조 누구는 시조 누구의 후손이지만 그 사이의 세계가 실전되어 중시조로부터 센다’라는 식으로 기록된 경우가 많다. 이 경우 시조에 대한 기록은 신빙성이 사실상 없다.] 사실상 고려 시대부터 성씨 제도가 정립되고, 이때 형성된 성씨가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이후 [[남북국시대]]로 들어서면서 [[발해]]든 [[신라]]든 토착식 복성 기록은 거의 쇠퇴한다. 왕족부터가 신라는 김씨, 발해는 대씨로 단성이다.[* 남북국시대 왕족 및 귀족층의 주요 성씨를 예로 들자면 발해의 경우 왕성인 대씨 및 주요 귀족 성씨인 고(高), 장(張), 양(楊), 두(竇; 하賀씨의 오기라는 설이 있다), 오(烏), 이(李), 배(裵), 왕(王)씨가 있었고 신라의 경우 왕족 3성씨인 박씨, 석씨, 김씨 및 주요 귀족이었던 신라 6부 성씨(이, 최, 정, 손, 배, 설) 및 [[가야]] [[금관국]] 김씨가 있었다.] [[통일신라]]가 한반도 대부분을 지배하면서 훗날 한국인 성씨의 대부분을 차지할 신라계 귀족 성씨들이 당시 기록에 보이기 시작한다. [[국성]]인 [[김씨]][* 일반적인 김씨는 신라계 [[경주 김씨]]고 [[가야]]계 [[김해 김씨]]는 [[http://db.history.go.kr/id/gskh_005_0080_0020_0030|신(新) 김씨라고 표현해]] 훗날의 본관 구분의 초기적인 형태가 등장한다.]와 옛 국성 [[박씨]]가 가장 많이 등장하고 그 외에 몰락한 옛 국성이자 중견 귀족가문이던 [[석씨]][[http://db.history.go.kr/id/jm_002r_0090_0060|#]], 각각 6부의 후손인 [[틀:신라 6성|이씨, 최씨, 정씨, 손씨, 배씨, 설씨,]] 그 외에 한반도 토착 성씨인 [[한씨]][[http://db.history.go.kr/id/gskh_005_0010_0020_0030|#]] 등 인명이 등장한다. 그러나 [[후삼국시대]]의 인명을 보면 신라나 발해 귀족층을 제외하고는 고려, 후백제 귀족 및 유력 호족층이라도 아예 성씨가 없는 고유명이 훨씬 많았다. 즉 남북국시대까지 성씨는 왕족과 귀족들이나 썼던 지배계층의 전유물이었고, 일반백성들과 천민들은 성씨없이 이름만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일반인들까지 김이박최정 같은 신라계 귀족 출신 성씨를 대부분 사용하는 것은 본래부터 그랬던 것이 아니라 중세 이후에 편입한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